5년차의 슬럼프


2-3년 전까지만해도 꿈을 이뤘다고 생각했다. 매 해 더 어렵고 까다로운 일들을 맡게되고, 또 그것을 잘 해내면서 인정을 받을 때 마다 내가 성장하고 있다고 믿었다. 내가 성장할 때마다 인정을 받았고, 인정 받을 때마다 난 성장했다. 쌓이는 신뢰도와 높은 인사평가의 점수가 곧 나의 자질이며 실력이라고도 생각했다. 내 목표의식은 항상 successful result에 있었기 때문에 그에 따르는 성취감과 업무 만족도는 비례했으며, 따라서 회사의 발전이 곧 나의 발전이었다.

덕분에 프로젝트들을 주도할 기회가 점차 많이 주어지게 되었고, 그 과정 속에서 솔직히 만족스러웠다기보단 회사의 비전을 고민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두세개의 프로젝트를 병행하면서도 나은 결과를 위해 신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많이 무리했었고,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정을 해보겠다고 사무실에 남아 새벽까지 일하다보면 어떤 날들에는 막역한 부담감이 너무 무거워 하염없이 눈물이 나기도 했다. 같이 일하는 팀원들은 다들 이미 힘들고 지친 나머지 프로젝트의 완성도를 높이는 작업에는 여력이 없는 모습들을 보며, 나도 점차 지쳐갔다. 내 열성을 다른 사람에게까지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개발 과정에서 아무리 time complexity와 design에 대해서 이야기해도, 반론을 제기하며 논쟁 했던 사람이 없다. 심지어 이미 개발을 다 끝낸 코드에 이슈를 제기했을 때도 상대방은 바로 수긍하며 다시 짜겠다고했다. 이상하게도 그 모습을 보며 화가 났다. 고민하지 않고 작성한 덕분에 쉽게 지워버릴 수 있는, 자존감이 없는 코드에 화가 났고, 그렇게 짜올 동안 누가 지적 한번 해준 적 없다는 상황이 화가 났다. 무엇보다 더 나은 방법이 있는지 찾아보지 않고 내 말 곧이 곧대로 수정하는 모습이 결국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내게 필요했던건 워라밸도, 높은 연봉도 아니라 최소한 나와 비슷한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내가 더 이상 이 회사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남아서 더 배워야할 우리 회사의 비전이나 기술력이 있는지 혼자 고민도 해보고 수석님에게도 강구해봤지만 만족스러운 대답을 듣지 못했다. 더 이상 내가 하는 일이 개발로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어플리케이션 개발자로서 성장하는 로드맵은, 그저 신규 OS 출시에 따라 앱을 보완해가는 것 뿐이다. 누구는 신규 기술을 연구하며 이끌어가지만, 나는 그 기술을 검토하며 따라만 간다. 나의 역할은 그저 상황에 맞게 api를 가져다 쓰는 기술자다. 학원에서 6개월 공부해서 들어온 직원도 몇개월 내에 금방 해내고, 하다못해 10년 가까이 개발한 사람도 나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돌이켜보니 나는 개발을 잘 했던 것이 아니라 업무를 잘 해냈던 것이다. 매년 성장하는 줄 알았는데 이제와보니 난 그저 도태되고 있었다. 19살부터 일을 시작한탓에 어딜가도 늘 어린 개발자였고, 지금 당장 다른 일을 시작해도 늦은 나이가 아니라는 걸 안다. 그러나 막상 5년을 돌아보고나니, 착각 속에 살았던 그 정신과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지금의 내 모습은 개발자가 아니라 회사원에 지나지 않는다.

착각 속에서 깨고 나니 사무실 안의 내 모습이 참 비참하고 또 비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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